쉬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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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 — 위선을 향한 여덟 가지 화와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마태복음 23장 · 일반판 쉬운 주석 · 근거: 퍼블릭 도메인 주석 5종 종합

요약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마지막 담화입니다. 여러 때와 장소의 말씀을 모은 것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과 점층적 성격으로 보아 완악한 백성을 향한 한 시점의 고별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풀핏] 예수께서는 먼저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바리새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사람들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은 크고 높은 칭호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므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헨리] 이어 이 장은 그들의 직분을 인정하는 원칙(2~3절), 위선과 교만에 대한 경계(4~12절), "화가 있다"를 앞세운 여덟 가지 죄목의 고발(13~33절),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예언(34~39절)으로 이어집니다.[헨리] 여덟 가지 화는 산상수훈의 팔복에 정면으로 맞서는 선언이며, 복음의 저주가 모든 저주 가운데 가장 무겁습니다.[헨리]

장의 흐름

  • 1~3절 —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 그들의 가르침은 지키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 4~7절 — 위선의 행태: 무거운 짐, 경문 띠와 옷술, 윗자리와 호칭에 대한 탐욕.
  • 8~12절 — 제자들에게 주는 겸손의 계명: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 13~15절 — 처음 세 화: 닫힌 천국, 과부의 집, 잘못된 개종자.
  • 16~22절 — 넷째 화: 맹세를 자의로 구별하는 궤변.
  • 23~24절 — 다섯째 화: 십일조는 드리면서 더 중요한 것을 버림.
  • 25~28절 — 여섯째·일곱째 화: 잔의 겉과 속, 회칠한 무덤.
  • 29~36절 — 여덟째 화와 심판 예고: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 세대.
  • 37~39절 —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과 버려짐의 선언.

단락별 해설

1~3절 —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고 행하여라.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

이 장은 직분과 인격을 구별하는 원칙으로 열립니다. "모세의 자리"란 율법을 공개적으로 해설하는 교사의 자리이니, 유대 교사는 성경을 읽을 때는 서고 해설할 때는 앉았습니다.[JFB] 나쁜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자리 자체를 허물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두어야 합니다(3절).[헨리]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라"는 말씀은, 나쁜 목회자가 전하는 진리라도 나쁘게 여겨서는 안 됨을 가르칩니다. 음식이 까마귀에게서 왔다 할지라도 좋으면 받아먹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헨리]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는 복종해야 할 명령을 율법 자체에서 끌어온 것으로 제한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JFB] 목자의 삶이 방탕하여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이 종교 전체를 멸시하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그런 소란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의 권위는 온전히 보존되어야 합니다.[칼빈] 성도는 전하는 자의 허물을 핑계 삼아 진리를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4~7절 — 위선의 행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띠를 넓게 만들고 옷자락의 술을 길게 늘인다." (마태복음 23장 5절)

여기서 네 가지 죄목이 고발됩니다. 곧 말과 행실의 불일치, 다른 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음, 모든 행위를 보이기 위해 함, 그리고 지위와 탁월함을 탐함입니다.[헨리] 그들이 지운 "짐"은 율법 의식의 부담뿐 아니라, 정작 자신들이 부과한 것을 지키는 데 냉담한 태도까지 가리킵니다.[JFB] 경문 띠는 기도할 때 이마와 팔에 차던, 성경 구절을 적은 양피지 조각이며(5절), 옷술은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려 옷 모퉁이에 단 것입니다.[JFB·풀핏] 이것들을 화려하게 넓히고 길게 늘인 것은 나머지 백성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불쾌한 야망에서 나왔습니다.[칼빈] 시장에서 인사받고 "랍비여, 랍비여"라 불리기를 즐긴 것은(7절), 그 호칭이 얼마나 기꺼이 수용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JFB] 사람의 눈을 관객으로 삼는 경건은 이렇게 그 뿌리부터 병들어 있으니, 성도는 자기 행위의 관객이 누구인지를 늘 물어야 합니다.

8~12절 — 제자들에게 주는 겸손의 계명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1~12절)

예수께서는 시선을 돌려 제자들에게 겸손과 상호 복종을 명하십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낮아짐이, 겸손한 자에게는 높아짐이 예정되어 있습니다(12절).[헨리] 랍비·아버지·지도자로 불리지 말라는 말씀의 적용 범위를 두고는 결이 갈립니다.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취해 모든 직함을 정죄하는 것으로 읽으면 사실상 교회의 통치 자체를 정죄하는 셈이 되므로, 교만의 정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 이름들이 쓰이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JFB·풀핏] 칼빈도 형제적 교제를 침해하지 않는 교사의 권위는 정죄되지 않으며, 아버지라는 영예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에만 그것이 사람에게 거짓으로 돌려진다고 구분합니다.[칼빈] 반면 헨리는 이 구절에서 한 사람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는 수위권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신 것으로 읽습니다. 만일 그런 자리를 세우려 하셨다면 이 좋은 기회에 알려 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헨리] 어느 쪽이든 공통된 것은, 성도가 형제를 다스리려는 야망을 버리고 섬김으로 큰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공통]

13~15절 — 처음 세 화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를 닫아 버려,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여기서부터 여덟 가지 화가 쏟아집니다. 첫째 화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은 죄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막았으니(13절), 우리의 구원이 세상 어느 한 사람이나 단체의 손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 도리어 다행입니다.[헨리] 둘째 화는 과부의 집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길게 기도하는 죄입니다(14절). 그들은 과부의 무방비한 처지와 믿는 성품을 이용해 재산을 얻어내면서, 오랜 기도로 자신이 세속보다 높은 곳에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JFB]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오랜 기도 자체가 아니라, 비천한 이득을 위한 덫으로 전용된 그 남용입니다.[칼빈] 셋째 화는 잘못된 개종자를 만드는 죄입니다(15절). 개종자를 얻으려는 수고 자체는 칭찬할 만하나, 그들이 목표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개종시켰다는 명예와 먹잇감으로 삼는 유익이었습니다.[헨리] 타락한 개종자는 흔히 스승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극성스러운 광신자가 되니, 그렇게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맙니다.[헨리] 성도는 전도의 열심조차 그 동기와 방향을 늘 살펴야 합니다.

16~22절 — 맹세를 자의로 구별하는 궤변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그것에 매인다'고 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금이냐, 아니면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복음 23장 16~17절)

넷째 화는 맹세를 두고 만들어 낸 교묘한 구별을 겨냥합니다. 그 사악함은 이중적이어서, 어떤 맹세는 면제할 수 있다고 한 것과, 성전보다 금을 제단보다 예물을 높인 것 둘 다에 있습니다.[헨리] 유대인은 성전과 제단 자체보다 그 금과 예물에 더 큰 경외심을 가졌는데, 이 오류는 먹이를 모으기에 적합한 계략으로서 서기관과 제사장들에게서 나왔을 것입니다.[칼빈] 그러나 성전이 금을 거룩하게 하고 제단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니(17·19절), 실상은 성전과 제단이 더 큽니다.[공통] 그러므로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그 위의 모든 것을,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을,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20~22절). 오직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목적을 위해 서원의 신성함을 흩뜨린 이 궤변은, 결국 모든 맹세가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가려 버립니다.[JFB] 성도는 어떤 말로 맹세하든 그 맹세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23~24절 — 사소한 것과 더 중요한 것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작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려 두었다.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다섯째 화는 순서를 뒤집은 위선을 고발합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인데, 십일조는 그들에게 큰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도 세간의 평판만 높였습니다.[헨리] 십일조 율법은 본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만 적용되었으나, 바리새인은 과도한 꼼꼼함으로 이를 가장 작은 채소에까지 확대했습니다.[풀핏] 이렇게 가장 작고 사소한 것에 몰두하며 주된 요점을 뒤로 미루는 것은 자연적 질서를 뒤엎는 일입니다.[칼빈]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킨다는 말씀(24절)이 이 전도된 태도를 강렬하게 그려 냅니다. 더 엄격한 유대인들이 하루살이가 들어갈까 봐 포도주와 식초를 천으로 걸러 마시던 관습이 있었으니, 이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합니다.[JFB] 다만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폐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라 하셨으니, 성도는 작은 순종을 지키되 더 큰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25~28절 — 잔의 겉과 속, 회칠한 무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3장 27~28절)

여섯째 화는 잔과 접시의 겉만 닦는 죄입니다. 바리새인은 잔을 씻는 것을 종교로 삼았으나(25절), 먼저 내면을 씻으면 겉도 깨끗해지는 법인데도 외적 동기만으로는 속이 더러운 채 남았습니다.[헨리] 일곱째 화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것입니다. 무덤을 석회로 칠하는 것은 정해진 날에 연 한 번 행하던 관행으로, 의식적 정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행인이 밟아 부정해지지 않도록 표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JFB·풀핏] 겉은 아름다우나 속은 죽은 자의 뼈로 가득한 이 무덤이 곧 위선자의 정확한 초상입니다(27~28절).[공통] 위선은 모든 불의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니(28절), 겉모습의 의로움과 속의 부패가 이토록 벌어질 수 있습니다.[헨리] 성도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겉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속을 먼저 깨끗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9~36절 —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 세대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장 33절)

여덟째 화는 선지자의 무덤을 지으면서도 정작 살아 있는 선지자를 박해하는 죄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이미 죽어 더 이상 자신들을 책망하지 않는 신실한 목회자의 기억에는 쉽게 경의를 표합니다. 죽은 선지자의 글은 견딜 수 있으나, 살아 있는 증인들은 여전히 증언하며 그들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헨리]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씀은(33절), 예수께서 사역의 끝에서 세례자 요한이 사역의 시작에서 한 말을 다시 불러일으키신 것으로, 지금 그들에 대한 정죄가 그때보다 성숙했을 뿐임을 암시합니다.[JFB] 죄에도 채워져야 할 분량이 있으니(32절),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을 그 욕망에 넘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헨리] 이어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와 지혜자와 율법학자들을 보내실 것을 예고하시는데(34절), 이는 부활 후에 성취되었습니다.[헨리] 하나님이 유기된 자들에게도 의도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그들에게 사망으로부터 나는 사망의 냄새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칼빈] 그리하여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 뜰에서 죽임당한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35절), 흘린 모든 의인의 피가 이 세대에 돌아옵니다.[헨리·칼빈]

37~39절 —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3장 37절)

준엄한 화의 선언은 뜻밖에도 뜨거운 탄식으로 끝납니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비유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으니, 부드러운 사랑으로, 그리고 보호와 안전과 따스함과 위로를 위해 모으는 것입니다.[헨리]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에 비교하실 때에도 이미 매우 낮아지신 것인데, 암탉의 형상을 취하시고 우리를 병아리처럼 대하시겠다 하실 때는 얼마나 더 낮아지시는 것입니까.[칼빈]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는 한마디가 그 사랑을 거절한 완악함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그 집이 버림받아 황폐하게 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38절).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떠나신 것이 곧 성전이 버려짐이니,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이 마침내 떠나시자 영광이 함께 떠났습니다.[헨리·JFB]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때까지 다시는 그분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39절)은, 심판의 날도 회심의 한 사례도 아니라 최종적 회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힙니다.[칼빈] 성도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거절하는 완악함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심판을 부른다는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연결된 말씀

  • 마태복음 5장 — 산상수훈의 팔복으로, 이 장의 여덟 가지 화가 그 복 선언에 정면으로 맞서는 저주로 지목됩니다.
  • 마태복음 13장 —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두라는 비유로, 나쁜 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해도 자리를 허물지 말라는 2~3절 해설의 근거가 됩니다.
  • 역대하 24장 —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사건으로, 35절 "사가랴의 피"가 가리키는 인물로 지목됩니다.
  • 창세기 15장 —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찼을 때를 말하며,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 이 세대의 죄에 대한 해설의 배경이 됩니다.
  • 누가복음 11장 — "하나님의 지혜가 말하기를"이라는 병행 표현으로, 34절에서 선지자와 지혜자를 보내신다는 말씀의 변형으로 언급됩니다.
  • 요한복음 20장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으로, 34절의 예고가 성취된 자리로 지목됩니다.
  • 스가랴 12장 — 통곡하며 그분을 바라보는 최종 회복의 예언으로, 3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의 성취와 연결됩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3장의 중심은 겉과 속이 갈라진 위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근본 죄는 말과 행실의 불일치였고,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덟 가지 화는 그 위선의 여러 얼굴을 하나하나 벗겨 내며, 팔복이 약속한 복과 정반대의 자리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속을 먼저 깨끗이 하여, 겉의 의로움과 속의 부패가 벌어지지 않도록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둘째,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원리를 따라, 섬김으로 큰 자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준엄한 화의 선언 끝에 놓인 암탉의 탄식이 보여 주듯, 심판을 부르는 것은 결국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거절하는 완악함입니다. 성도는 그 날개 아래로 기꺼이 모여드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참고한 주석: [헨리] [JFB] [칼빈] [풀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