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향한 여덟 번의 화
요약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무렵 성전에서 하신 긴 말씀입니다. 앞선 여러 장에서 예수님과 부딪치던 율법학자와 바리새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겉과 속이 다른 신앙, 곧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의 무서움입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자리는 인정하시되 그 행실은 본받지 말라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높은 칭호를 탐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이르십니다. 이어지는 가운데에는 "화가 있다"로 시작하는 여덟 번의 엄한 책망이 놓여 있는데, 하늘나라 문을 닫는 것에서부터 회칠한 무덤 같은 겉치레까지 위선의 여러 얼굴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선언과 함께, 암탉이 새끼를 모으듯 그들을 품으려 하신 예수님의 깊은 슬픔이 함께 나옵니다. 결국 이 장은 남의 위선을 고발하라는 글이 아니라, 내 신앙의 겉과 속이 같은지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장의 흐름
- 1~3절 — 모세의 자리에 앉은 그들의 말은 지키되,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행실은 본받지 말라.
- 4~7절 —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경문 띠와 옷술을 과시하며, 윗자리와 랍비라는 호칭을 탐하는 위선.
- 8~12절 — 랍비·아버지·지도자로 불리려 하지 말라. 큰 자는 섬기는 자이며,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 13~15절 — 첫 세 가지 화: 하늘나라 문을 닫음, 과부의 집을 삼킴, 개종자를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듦.
- 16~22절 — 넷째 화: 성전과 금, 제단과 예물을 두고 하는 맹세의 궤변.
- 23~28절 — 다섯째부터 일곱째 화: 사소한 십일조와 잔의 겉만 챙기고,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썩음.
- 29~36절 — 여덟째 화: 선지자의 무덤을 지으면서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함.
- 37~39절 —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과 심판의 선언.
단락별 해설
1~12절 — 자리는 인정하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고 행하여라.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 3절)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서기관과 바리새 사람이 앉은 모세의 자리 자체는 인정하십니다(2절). 모세의 자리란 율법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해석하는 자리입니다.[풀핏] 그래서 그들이 율법에서 끌어와 가르치는 말은 지키라 하시는데, 여기서 "그러므로"는 지켜야 할 명령을 율법 자체에서 나온 것으로 한정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JFB] 나쁜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았다고 그 자리까지 허물 필요는 없고, 나쁜 목회자가 전하는 진리라도 진리는 진리로 받으면 됩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준 음식이라도 좋으면 받아먹으라는 것과 같습니다.[헨리]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면 들어야 하지만 자기 것을 가르치려 하면 듣지도 행하지도 말아야 합니다.[칼빈]
문제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가지 죄를 짚으십니다. 말과 행실이 어긋나고,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면서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 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입니다(4~7절).[헨리] 이마와 팔에 매다는 경문 띠를 크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인 것은, 남과 자신을 구별해 더 경건해 보이려는 야망에서 나온 일입니다(5절).[칼빈·JFB] 좋은 일을 하고서 그 반응을 확인하려 SNS를 열어 본 적이 있다면, 이 모습이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정반대의 길을 명하십니다. 랍비나 아버지나 지도자라는 높임말로 불리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8~10절). 이 말씀을 두고, 그리스도께서 특정 사람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는 수위권 자체를 정죄하신 것으로 읽는 주석도 있습니다.[헨리] 반면 랍비라는 이름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형제를 다스리려는 야망을 억제하신 것이라 보고, 그런 칭호가 교만의 정신으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으로 설명하는 주석도 있습니다.[칼빈·JFB] 어느 쪽으로 읽든 공통된 결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2절)
가장 큰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며,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11~12절).[공통] 반 친구보다 조금 앞선 성적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를 얻었을 때, 그것으로 나를 높이려는 마음이 슬며시 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13~15절 — 닫힌 문, 삼켜진 집, 배나 된 자식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를 닫아 버려,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이제 "화가 있다"로 시작하는 책망이 이어집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 문을 닫아,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았습니다(13절).[헨리] 우리의 구원이 세상 어느 한 사람이나 단체의 손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헨리] 둘째로 그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길게 기도했습니다(14절). 무방비한 과부의 처지를 이용해 재산을 얻으면서, 긴 기도로 자신이 남보다 거룩하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JFB] 예수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오랜 기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득을 얻는 덫으로 바꿔 버린 남용입니다.[칼빈] 셋째로 그들은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지만, 정작 그 사람을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15절). 개종자를 얻으려는 수고 자체는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주석도 있고, 그 시대에 이방인을 그런 종교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모독에 가까웠다고 설명하는 주석도 있습니다.[헨리·칼빈]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면, 그 열심이 클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것입니다.
16~22절 — 맹세를 두고 벌인 말장난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그것에 매인다'고 한다. (마태복음 23장 16절)
넷째 책망은 맹세를 두고 벌인 교묘한 말장난을 향합니다.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6절). 예수님은 되물으십니다. 금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성전인데, 어느 것이 더 크냐는 것입니다(17절). 제단과 예물도 마찬가지여서,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제단입니다(19절). 이런 구별은 사실 성전과 제단보다 금과 예물에 더 큰 경외심을 두게 만든 오류였고, 그 뒤에는 사람들의 헌물을 먹이로 모으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칼빈] 결국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그 위의 모든 것을,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20~21절).[헨리] 지킬 맹세와 어겨도 될 맹세를 나누려는 마음은, 약속을 교묘히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는 오늘의 나와도 닮아 있습니다.
23~28절 — 정작 중요한 것, 겉과 속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작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려 두었다.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다섯째 책망은 무엇을 앞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처럼 아주 작은 채소의 십일조까지 꼼꼼히 드리면서, 정작 율법에서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려 두었습니다(23절). 십일조는 그들에게 큰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도 세간의 평판을 높여 주었습니다.[헨리] 가장 사소한 것에 몰두하며 정작 중요한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마땅한 순서를 완전히 뒤엎는 일입니다.[칼빈] 그래서 예수님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킨다고 하십니다(24절). 이는 아주 작은 잘못은 꼼꼼히 피하면서 훨씬 큰 죄는 태연히 저지르는 위선을 가리키는 강렬한 표현입니다.[JFB]
여섯째와 일곱째 책망은 겉과 속의 대비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정성껏 닦으면서 그 속은 탐욕과 불의로 채웠습니다(25절). 예수님은 먼저 속을 깨끗이 하라 하십니다. 안이 깨끗해지면 겉도 깨끗해지지만, 겉만 닦는 것으로는 속이 더럽게 남기 때문입니다.[헨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무심코 밟아 부정해지지 않도록 무덤을 하얗게 칠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JFB·풀핏] 예수님은 그 회칠한 무덤을 위선자의 초상으로 삼으십니다. 겉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그들도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차 있었습니다(27~28절).[공통] 시험 기간에 공부하는 척 책만 펴 두고 마음은 딴 데 가 있던 순간을 떠올리면, 겉과 속이 다른 이 모습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29~36절 — 무덤은 지으면서, 선지자는 죽이고
여덟째 책망은 그들의 모순을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짓고 의인들의 묘를 단장하면서,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습니다(29~30절). 그러나 사람은 이미 죽어 더 이상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선지자에게는 쉽게 경의를 표합니다. 죽은 선지자의 글은 견딜 수 있어도, 살아서 여전히 자신을 찌르는 증인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헨리]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증언하고 말았습니다(31절).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장 33절)
죄에도 채워야 할 분량이 있어서, 고집스럽게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을 그 욕망에 그대로 넘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헨리] 예수님이 여기서 쓰신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 했던 말인데, 사역의 끝에서 다시 부르심으로써 이제 그 정죄가 그만큼 무르익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JFB] 이어 예수님은 선지자와 지혜로운 사람과 율법학자들을 보내실 것을 예고하시며,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 뜰에서 죽임당한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흘린 모든 의인의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갈 것이라 선언하십니다(34~36절). 여기 사가랴는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여호야다의 아들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헨리·칼빈·풀핏]
37~39절 —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3장 37절)
무섭게 꾸짖으시던 그 입술에서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 깊은 슬픔이 흘러나옵니다. 암탉이 위험 앞에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예수님은 그들을 보호와 따스함과 위로로 품으려 하셨습니다(37절).[헨리]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에 비기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크게 낮아지신 것인데, 암탉의 형상을 취하시고 우리를 병아리처럼 대하시겠다 하실 때는 얼마나 더 낮아지시는 것인지 모릅니다.[칼빈] 그러나 그들은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집은 버림받아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38절).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이 마침내 떠나시자, 그 성전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보호를 잃게 됩니다.[JFB·헨리]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한 줄기 소망을 남겨 두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라고 그들이 말할 때까지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39절). 이는 먼 훗날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칼빈]
연결된 말씀
- 마태복음 5장 — 산상수훈의 팔복. 이 장의 여덟 번 "화가 있다"는 팔복과 나란히 놓여 대조를 이룹니다.
- 마태복음 13장 —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함께 두라는 비유. 나쁜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아도 그 자리를 함부로 허물지 말라는 2~3절 원칙의 배경입니다.
- 창세기 15장 —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차기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씀.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라는 32절의 그림이 여기서 왔습니다.
- 역대하 24장 —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 35절이 가리키는 의인의 피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 스가랴 12장 — 찌른 자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최종 회복의 예언. 3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의 소망과 이어집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3장은 위선, 곧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여덟 번이나 힘주어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읽는 바른 자리는 남의 위선을 손가락질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 겉과 속이 같은지를 비추어 보는 거울 앞입니다. 예수님이 미워하신 것은 종교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려는 무대로 삼는 마음이었습니다.[공통] 그리고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신 바로 그분이, 마지막에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 그들을 모으려 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헨리] 남에게 보이려고 꾸민 경건은 잠시 사람의 인정을 얻지만, 속까지 깨끗한 신앙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가 누구의 시선을 향하고 있는지 잠시 멈추어 보게 됩니다. 나는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다른 사람인가요,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속과 겉이 같기를 구하는 사람인가요?
참고한 주석: [헨리] [JFB] [칼빈] [풀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