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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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 겸손한 왕의 입성과 빼앗기는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21장 · 일반판 쉬운 주석 · 근거: 퍼블릭 도메인 주석 5종 종합

요약

마태복음 21장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수난 주간이 시작되는 장입니다.[헨리] 마태는 이 장을 여섯 단락으로 엮어, 공개적인 입성과 성전 정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 세례 요한에 호소하신 권위 정당화, 두 아들의 비유, 악한 농부의 비유를 차례로 배치합니다.[헨리] 그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개혁자로, 심판자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이며, 그 심판의 선포 가운데서도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에게 열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헨리] 앞부분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을 무리가 호산나로 맞이하는 영광의 장면으로 열리지만, 장이 진행될수록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 나라가 다른 백성에게 옮겨진다는 엄중한 선언으로 향합니다.

장의 흐름

  • 1~11절 — 입성: 나귀와 새끼 나귀를 준비시켜 스가랴의 예언대로 겸손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심.
  • 12~17절 — 성전 정화: 사고파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기도하는 집을 되찾으시며 아이들의 찬양을 받으심.
  • 18~22절 — 무화과나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시고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심.
  • 23~27절 — 권위 논쟁: 요한의 세례를 되물으심으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진퇴양난에 빠뜨리심.
  • 28~32절 — 두 아들의 비유: 말보다 행동이며, 회개한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 33~46절 — 악한 농부의 비유: 아들까지 죽인 농부들과 하나님 나라의 이전, 버려진 돌이 머릿돌 됨.

단락별 해설

1~11절 —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며 나귀를, 곧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태복음 21장 5절)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의 마지막을 향해서야 비로소 왕의 칭호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으니, 이 일이 스가랴의 예언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우스꽝스러운 과시에 불과했을 것입니다.[칼빈] 그러나 그 입성의 방식은 세상 왕의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나귀를 준비하는 일의 즉흥성과 볼품없음, 그리고 그것이 빌린 것이라는 세 가지 특징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가 아님을 드러냅니다.[헨리] 매여 있는 나귀의 위치를 아시고 그 주인의 마음을 한마디로 순순히 굽히신 데서, 멀리 있는 일을 아시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복종하게 하시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임이 증명됩니다.[헨리·칼빈]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위엄이 아니라 온유함 속에 나타나심은 진노로 보복하러 오심이 아니라 자비로 구원하러 오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헨리]

무리가 외친 호산나는 본래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환영하는 것과 그 나라가 번성하기를 구하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헨리] 이 외침은 시편의 한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분별한 열광이 아니라 성령께서 온 교회에 정해 주신 기도의 형식을 경건하게 따른 것입니다.[칼빈] 온 성이 "이분이 누구냐"고 물을 때 무리가 그분을 선지자라 대답한 것은, 때로 백성의 소리가 관원들의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 바르게 알아본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헨리] 다만 옛 주석가들 사이에는 나귀 두 마리를 두고 결이 갈립니다. 암나귀를 유대 민족으로, 새끼 나귀를 이방인으로 읽는 신비적 해석을 두고 그것을 터무니없다고 명백히 배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스가랴의 예언이 실제로 두 동물을 함께 내다보았을 가능성까지 신중히 논하는 이도 있습니다.[칼빈·풀핏]

12~17절 — 강도의 소굴이 된 기도의 집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마태복음 21장 13절)

성전에서 장사꾼을 내쫓으심은 위대한 구속주께서 위대한 개혁자로 나타나신 사건입니다.[헨리] 성전 안의 매매는 구약에 흔적이 없고 포로 귀환 이후에 생긴 관행으로, 제사장들의 허가와 이익 아래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풀핏] 예수께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향한 예언과 위선자를 향한 책망의 말씀을 결합하여, 성전에 대한 신뢰를 빙자해 죄에 더 큰 자유를 허락한 위선을 지적하십니다.[칼빈] 다만 이 열심의 적용을 두고는 견해가 갈립니다. 이를 오늘날에도 본받을 개혁의 모범으로 더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공적 권위가 없는 사사로운 개인은 하나님이 치유책을 가져오실 때까지 신음해야 한다며 그 모방을 강하게 제한하는 이도 있습니다.[헨리·칼빈]

이어 성전에서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신 일은 특별한 뜻을 지닙니다. 다윗의 궁에는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가 들어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집에서는 받아들여지니, 성전이 장터일 때는 더럽혀졌으나 병원이 되었을 때는 도리어 영광스러워졌습니다.[헨리] 이 치유는 백성이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해 선포한 찬양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목소리로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칼빈] 성전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아이들을 두고 분개하는 제사장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편의 말씀으로 답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입에서 찬송이 들려오게 하시기보다 차라리 돌들을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칼빈] 그런 뒤 베다니로 물러가심은 원망과 트집을 피하시는 지혜로운 행동이자, 그분의 임재를 탐내지 않는 자들에게서 그것을 거두시는 공의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헨리]

18~22절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셨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그러자 그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 (마태복음 21장 19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잎은 있으나 열매 없는 위선자 일반에 대한 경고이자, 특별히 그리스도께 실망을 드리고 이후로 아무 선한 것도 내지 못하게 될 유대 민족에 대한 선고입니다.[헨리] 비정상적인 시기에 잎만 무성했던 이 나무의 상태는 근본적 결함에 따른 헛된 활동을 가리키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파괴하는 능력을 발휘하신 유일한 사례로 여겨집니다.[풀핏] 제자들이 그 즉각적인 효과에 놀라니, 복음의 저주는 타오르지 않는 불처럼 조용히 소리 없이 일하기에 도리어 가장 두렵습니다.[헨리]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께서는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믿음은 영혼이고 기도는 그 몸이니, 둘이 합쳐질 때 온전한 봉사가 되며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는 약속은 매우 포괄적입니다.[헨리] 그러므로 여기서 요구되는 믿음은 확신이며 의심을 허용하지 않으니, 믿음과 의심을 뒤섞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칼빈]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말씀은 실제로 산을 옮기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의심 없는 믿음의 기도로 이룰 수 있다는 과장된 비유입니다.[칼빈·풀핏] 그러므로 성도는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3~27절 — 무슨 권위로 하느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 물었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소?" (마태복음 21장 23절)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질문은 오만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두 가지 목적을 지녔으며, 특히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일을 겨냥한 것입니다.[헨리·JFB] 예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를 되물으심으로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뜨리십니다. 요한이 손가락으로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하였으므로, 요한이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주님이심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칼빈]

그들이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답한 것은 자신들의 명예와 안전만을 계산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불의로 가두는 자는 더 이상 진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헨리] 그들의 진짜 어려움은 그리스도의 권세 주장을 거부하려는 결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백성 앞에서 명성을 잃지 않을 대답을 찾는 것이었지, 진리 자체에는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JFB]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며, 성도는 진리를 자기 이익의 계산 아래 두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JFB]

28~32절 — 두 아들의 비유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가 맏아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다. (마태복음 21장 28절)

두 아들의 비유는 말과 행동을 대비시킵니다. 말은 나빴으나 행동은 좋았던 아들은 회개한 세리와 창기를, 말은 좋았으나 행동은 나빴던 아들은 약속만 하고 순종은 없는 종교 지도자를 나타냅니다.[헨리]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다고 결론난 것은 행동이 말보다 낫고 마지막이 처음보다 나았기 때문입니다.[헨리] "싫습니다"라는 대답에 아무 변명도 없다는 점은 하나님 앞에서 대놓고 저항하는 무모한 죄인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28~29절), 시간이 지나며 굴복하는 위선은 처음부터 거절하는 강퍅함보다 오히려 견디기 어렵습니다.[JFB·칼빈]

그런가 하면 "예, 가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대답하고도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의 모습에는,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말하는 자기 의의 자기만족이 배어 있습니다.[JFB] 그리스도께서 서기관과 제사장보다 멸시받던 자들을 선호하신 것은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 더 이상 가장된 열심을 내보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칼빈] 그리하여 세리와 창기가 종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시니(31절), 회개한 죄인이 위선적인 자기 의인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습니다.[공통]

33~46절 — 악한 농부와 버려진 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니, 이것은 주께로 말미암은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서 빼앗겨, 그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질 것이요, 이 돌이 누구 위에 떨어지든지 그를 가루처럼 흩어 버릴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42~44절)

이 비유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포도원으로 그린 이사야의 그림을 기초로 삼으니, 그 이미지는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에 이미 확고히 자리한 것이었습니다.[JFB·풀핏] 비유의 목적은 둘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의 비열한 배은망덕을 책망하는 것과, 임박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으킬 걸림돌을 미리 제거하는 것입니다.[칼빈] 포도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요 울타리는 언약이며, 세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기대는 조급하지도 가혹하지도 않았습니다.[헨리] 종들에 대한 반복된 학대에도 하나님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는 인내를 베푸시다가,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시며 아들을 보내셨으니, 이는 은혜가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드러냅니다.[헨리]

비유가 "마침내"라는 말에 이르러 알레고리의 형식을 벗고 현재와 미래를 가리키는 역사와 예언으로 전환되면서, 청중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게 됩니다.[풀핏]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 죽였다는 대목은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처형 장소를 암시합니다.[JFB·풀핏] 그들 자신의 입에서 선고가 나온 것은, 하나님의 진행 방식이 죄인들에게조차 그 공정함에 호소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함을 보여 줍니다.[헨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됨은 유대인의 거부와 이방인의 영접을 나타내며, 이 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거룩한 집으로 연합시킵니다.[헨리·풀핏] 하나님 나라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씨 안에 세워진 보이는 나라였으나, 이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추려진 신자들의 공동체에게 주어집니다.[JFB] 본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접붙인 가지들에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은 한 번 유대인들에게 하셨지만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칼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킨 줄 깨닫고도 무리를 두려워하여 손을 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위협 앞에서도 자발적 두려움으로 굴복하지 못하는 완악함을 드러냅니다.[헨리·칼빈]

연결된 말씀

  • 스가랴 9장 —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는 겸손한 왕의 예언으로, 나귀를 타신 입성이 이 말씀을 이룬 것으로 인용됩니다.
  • 시편 118편 —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의 원천으로, 입성의 환호와 33~46절 비유의 결론을 함께 뒷받침합니다.
  • 시편 8편 —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송을 온전케 하셨다"는 말씀으로, 성전에서 아이들의 호산나를 정당화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 이사야 56장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예언으로, 성전을 정화하시며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 예레미야 7장 — "강도의 소굴"이라는 책망으로, 위선을 지적하시는 성전 정화 말씀에 결합됩니다.
  • 이사야 5장 —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포도원으로 그린 노래로, 악한 농부 비유의 기초가 됩니다.
  • 에스겔 18장 — 회개하는 자와 배교하는 자를 가르는 심판의 규칙으로, 두 아들 비유에서 마지막이 처음보다 낫다는 결론과 나란히 놓입니다.
  • 로마서 11장 — 본 가지와 접붙인 가지를 말하며, 하나님 나라가 열매 맺는 백성에게 옮겨진다는 43절 선언의 배경이 됩니다.
  • 다니엘 2장 — 사람 위에 떨어져 가루로 만드는 돌의 환상으로, "부서짐"과 "가루로 흩음"을 가르는 44절 해설의 근거입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1장의 중심은 그리스도께서 겸손한 왕이자 성전의 개혁자요 나라를 옮기시는 심판자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귀를 타신 왕은 자비로 구원하러 오셨으나,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신앙과 말뿐인 순종은 그 앞에서 마르고 빼앗기며, 아들을 죽인 농부에게서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순종하여 겉모습의 잎이 아니라 실제의 열매로 하나님의 기대에 응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헨리] 둘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제때에 열매를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공통]

참고한 주석: [헨리] [JFB] [칼빈] [풀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