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주석
청소년어린이일반

마태복음 2장 — 경배하러 온 사람들과 칼을 든 왕

마태복음 2장 · 청소년판 쉬운 주석 · 근거: 퍼블릭 도메인 주석 5종 종합

요약

앞의 1장은 족보와 탄생 기록으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이어지는 2장은 그렇게 태어나신 왕을 세상이 어떻게 맞이했는지 보여 줍니다. 반응은 정반대로 갈렸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이방 학자들은 별 하나를 보고 먼 길을 걸어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손에 들고 있던 예루살렘은 불안에 떨었고, 헤롯 왕은 아기를 죽이려고 칼을 들었습니다. 이 장은 네 가지 옛 예언이 이루어지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탄생(6절), 이집트 피신(15절), 베들레헴의 통곡(18절), 나사렛 정착(23절)입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거부하고 멀리 있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 대조는, 앞으로 복음이 걸어갈 길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장의 흐름

  • 1~8절 —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와서 새 왕을 찾고, 헤롯은 불안 속에 예언으로 탄생지를 확인한 뒤 살해 계획을 감춘 채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 9~12절 — 별의 인도로 아기를 찾은 박사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뒤, 꿈의 경고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 13~15절 — 천사의 지시를 받은 요셉이 밤에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 16~18절 — 속은 것을 안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학살합니다.
  • 19~23절 — 헤롯이 죽은 뒤 가족이 돌아오지만, 아켈라오를 피해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단락별 해설

1~8절 — 멀리서 온 경배자, 가까이서 떠는 왕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장 2절)

박사들은 페르시아와 갈대아 지역에서 별을 연구하던 학자이자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1절). 그들의 수가 셋이었다거나 신분이 왕이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붙은 전승일 뿐, 성경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옛 주석가들은 기록된 것 이상을 알려는 호기심을 오히려 경계했습니다.[헨리·칼빈]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방식입니다. 유대 목자들에게는 천사를 보내셨지만, 별을 연구하던 동방 학자들에게는 별을 보내셨습니다. 각 사람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별은 자연 현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인도였다는 데 옛 주석가들의 목소리가 모입니다.[공통] 박사들의 질문도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태어나셨습니까"가 아니라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2절). 탄생 자체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조금 아는 사람은 그분을 더 알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한편 헤롯은 유다 지파는커녕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에돔 출신으로, 로마가 세워 준 왕이었습니다(1절). 이방인이 유다의 왕좌에 앉았다는 사실 자체가, 유다에서 왕권이 떠날 때 메시아가 오신다는 창세기의 오랜 예언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헨리·JFB] 그래서 새 왕의 소식에 헤롯은 왕좌를 빼앗길까 불안해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일로 벌어질 소요와 혼란을 두려워했습니다(3절). 악한 마음에는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소식이 없습니다. 오랜 고난에 무뎌진 백성이 정작 약속된 구원 소식 앞에서 동요했다는 것은 아픈 장면입니다. 헤롯이 소집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에서 정확한 답을 찾아냈습니다(4~6절).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 예루살렘에서 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이니, 하늘에서 내려온 참 양식이 태어나시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곳이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방인은 별을 보고 탄생의 때를 알았고, 유대인은 성경을 보고 탄생의 장소를 알았습니다(7절). 아는 것을 서로 나눌 때 지식은 커집니다. 그러나 헤롯의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려 하오"(8절)라는 말은 경건의 가면을 쓴 살해 계략이었습니다. 가장 큰 악은 종종 가장 경건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치밀한 헤롯이 박사들 뒤에 밀정 하나 붙일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지혜를 흐리게 하셔서 아기를 지키신 것입니다.[헨리·칼빈]

9~12절 — 다시 뜬 별과 열린 보물 상자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 아기와 그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그에게 드렸다." (마태복음 2장 11절)

예루살렘을 떠나자,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 앞서 갔습니다(9절).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분명한 안내가 있는 곳에서는 특별한 표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다시 인도하십니다. 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한 이유입니다(10절).[헨리]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이상한 공백이 하나 있습니다. 답을 정확히 알았던 학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함께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9절). 바로 옆 동네나 다름없는 거리인데도 그렇습니다. 옛 주석가들은 이것을 게으름이자 배은망덕이라고 아프게 불렀습니다.[공통] 성경 지식이 많다는 것과 그분께 실제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지 오래되어 답은 다 아는데, 정작 마음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나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박사들이 도착한 곳은 궁전이 아니라 평범한 집이었고, 가난한 어머니가 수행원의 전부였습니다(11절). 그래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초라한 겉모습 너머의 영광을 분별했습니다. 순서도 눈에 띕니다. 먼저 엎드려 자신을 드렸고, 그다음에 보물 상자를 열었습니다. 예물에 대해서는 두 갈래 설명이 있습니다. 황금은 왕께 드리는 공물,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 몰약은 죽으실 분을 위한 향품으로서 세 겹의 고백이라고 보는 주석이 있습니다.[헨리·풀핏] 반면 동방에서 왕을 뵐 때 자기 나라의 귀한 특산물을 바치던 관습이라고 설명하는 주석도 있습니다.[칼빈] 어느 쪽이든 핵심은 같습니다. 예물보다 먼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참된 경배라는 것입니다. 경배를 마친 박사들은 꿈에 경고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12절).

13~15절 — 한밤의 피신, 그러나 길은 하나님 손안에

그들이 떠난 뒤에, 보라,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 내가 너에게 이를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어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장 13절)

피신처가 하필 이집트입니다. 조상들이 종살이하던 바로 그 땅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가장 나쁜 곳도 가장 좋은 목적에 쓰십니다.[헨리] 물론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가깝고, 유대인이 많이 살았으며, 무엇보다 헤롯의 손이 닿지 않는 땅이었습니다(13절). 여비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박사들이 드린 황금이 이 가난한 가족의 피난 비용이 된 것입니다. 요셉의 순종은 그 밤으로 즉각 이루어졌습니다(14절). 순종을 확실하게 하려면 빠르게 해야 합니다. 천사가 덧붙인 "내가 너에게 이를 때까지"라는 말은, 낯선 유배지에서도 하나님이 계속 보호자가 되시겠다는 보증이었습니다(13절). 마태는 이 피신이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라는 호세아의 말씀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15절). 본래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가리키던 말씀입니다. 옛 주석가들은 한목소리로, 민족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다시 걸으심으로 그 말씀이 완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공통] 갓 태어난 왕이 밤중에 도망치는 모습은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 속에, 세상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16~18절 — 라마에서 들린 통곡

"그때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정확히 알아낸 때를 따라, 베들레헴과 그 모든 주변 지역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다." (마태복음 2장 16절)

헤롯은 자신이 속은 정도가 아니라 조롱당했다고 느꼈습니다(16절).[풀핏] 왕좌를 지키려고 가족까지 죽여 온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는 만행이 벌어졌습니다. 베들레헴이 작은 마을이었기에 희생된 아이는 스무 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하는 주석이 있습니다. 수가 적다고 비극이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옛 주석가들은 이 아이들을 첫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피 흘리실 분을 위해, 먼저 피를 흘린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헨리·풀핏] 마태는 이 참극에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읽어 냅니다(17~18절). 라헬은 베들레헴 근처에 묻힌 민족의 어머니입니다. 그 라헬이 무덤에서 자식들을 위해 통곡한다는 그림으로, 어머니들의 울음을 담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담긴 예레미야 31장은 본래 위로와 회복의 약속으로 가득한 장입니다. 통곡의 말씀을 인용한 것 자체가, 이 재앙이 끝이 아니라 곧 다가올 구원의 전주곡임을 알려 줍니다. 잃은 아이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간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위로의 가장 좋은 근거를 잃게 됩니다.

19~23절 —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살았다. 이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한 것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마태복음 2장 23절)

헤롯이 죽자 천사가 다시 나타나 돌아가라고 지시했습니다(19~20절). 그런데 명령은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까지였고, 정확한 목적지는 없었습니다. 요셉은 갈 곳을 다 알지 못한 채, 옛날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21절). 그러나 유대 땅에는 새로운 위협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는 아버지의 잔인함을 그대로 물려받아 즉위하자마자 삼천 명을 죽였고, 훗날 그 포악함 때문에 쫓겨난 통치자였습니다(22절). 요셉은 꿈의 경고를 따라, 통치자가 덜 잔인하고 거리도 먼 갈릴리로 물러가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23절). 마태가 말하는 "나사렛 사람" 예언은 어느 한 구절의 인용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이 말한 예언의 정신 전체를 가리킵니다.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가지'를 뜻하는 말과 이어져,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가지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나사렛은 멸시받던 무명의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그분이 멸시받고 버림받으실 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공통]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되어 드려진 나실인의 예표로 읽는 주석도 있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훈련 아래 계셨던 셈입니다. 그분이 겪으신 위험은 우리의 안전이 되었고, 그분의 두려움은 우리의 확신이 되었습니다.[칼빈] 이집트 피신과 나사렛의 조용한 세월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을 처음부터 함께 걸으신 과정이었습니다.

연결된 말씀

  • 창세기 49장 — 유다에서 왕권이 떠날 때 오실 분이 있다는 야곱의 예언입니다. 이방인 헤롯이 왕좌에 앉은 것(1절)이 바로 그때가 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 미가 5장 —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예언으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6절에서 찾아 읽은 바로 그 말씀입니다.
  • 에스겔 34장 — 백성을 목자처럼 돌보실 참 목자의 말씀. 6절의 "목자처럼 이끌 것이다"라는 표현의 배경입니다.
  • 호세아 11장 —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15절이 이루어졌다고 인용하는, 출애굽과 그리스도를 잇는 말씀입니다.
  • 예레미야 31장 — 라헬의 통곡(18절)이 인용된 장이면서, 본래는 회복과 위로의 약속으로 가득한 장입니다.
  • 이사야 11장 —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가지' 예언. "나사렛 사람"(23절)이라는 이름의 뿌리로 꼽히는 말씀입니다.
  • 이사야 53장 — 멸시받고 버림받는 종의 노래.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낮아지심과 이어집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장에는 같은 아기를 향한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별 하나만 보고도 먼 길을 걸어온 경배의 길과, 답을 다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거나 칼을 든 거부의 길입니다. 지식의 양이 두 길을 가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던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멀리 있었습니다.[공통] 그리고 이 장은 또 하나를 보여 줍니다. 왕의 칼과 낯선 피난길 속에서도, 하나님은 예언하신 그대로 아기를 한 걸음씩 지키고 이끄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험과 학원과 친구 관계로 꽉 찬 일상에서, 나도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만 쌓아 두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사들처럼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열어 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아는 데서 멈춘 사람인가요, 아니면 한 걸음 걸어가 경배하는 사람인가요? 오늘 내가 열어 드릴 나의 보물 상자는 무엇인가요?

참고한 주석: [헨리] [JFB] [칼빈] [풀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