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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s 3.13.4 — TWO THINGS TO BE OBSERVED IN GRATUITOUS JUSTIFICATION.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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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또한 약속 자체도 무효가 된다고 덧붙인다. 약속의 성취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다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공로를 쌓을 수 있겠는가? 이 둘째 귀결은 첫째에서 따라 나오는 것이니, 약속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무너지면 약속 안에 남아 있는 능력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에서 나고, 믿음에서 나는 것은 은혜에 속합니다. 이것은 약속이 모든 씨, 곧 모든 자손에게 확실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4:16). 약속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근거할 때 충분히 확고해진다. 자비와 진실은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비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 신실하게 이루신다. 이처럼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구원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근원을 그분의 자비에 둔다. "주님, 당신의 인자하심이 제 위안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시 119:76). 이는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도록 이끄는 것은 오직 순수한 자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고, 이른바 굳게 박아야 한다. 우리의 행위에 아무 관심도 두지 말고, 그것에서 아무 도움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도록,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하라고 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종들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약속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근거로 확고히 서 있으니,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선포하는 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 88편 강해, 제50강). 베르나르도도 이렇게 말한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질문에 그분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답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온전한 확신이요, 유일한 위로이며, 우리 소망의 전체 근거다. 그런데 가능성이 확실하다면, 그분의 뜻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이 사랑받을 자인지 미움받을 자인지 누가 알겠는가?(전 9:1).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쳤느냐?'(고전 2:16).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이 우리를 도와야 하고, 진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은밀한 뜻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성령께서 증언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마음에 납득시켜 주셔야 한다. 그런데 그분이 납득시키시는 것은 부르심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게 하심으로써이니, 이 안에서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장래의 영광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이행이 이루어진다"(베르나르두스, 성전 봉헌 설교 제5편). 이렇게 간략히 결론을 내리자.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양심의 충분한 확신으로 붙잡히지 않는 한 확실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어디서든 의심이나 불확실함이 있으면 약속은 무효가 된다고 선언한다. 반면에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으면 흔들리고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의가 무너지든지, 아니면 우리의 행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만 자리를 내어주든지 해야 한다. 믿음의 본성은 귀를 세우고 눈을 감는 것, 곧 약속에만 주목하고 사람에게 있는 어떤 존엄이나 공로도 포기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이 성취된다. "내가 그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할 것이다.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너희가 서로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할 것이다"(슥 3:9–10). 선지자는 신자들이 참된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 죄 사함을 얻는 것임을 암시한다.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외적인 자비를 영적 복의 표상으로 제시한다는 특징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사야서 9:6과 에베소서 2:14에서 평화의 왕, 우리의 평화라고 불린다. 그분이 양심의 모든 불안을 가라앉히시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묻는다면,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신 제사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신 그 속죄를 하나님이 오직 그것으로만 기쁘게 받으신다고 붙잡기 전까지, 아무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평화는 우리의 구속자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 어디서도 찾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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