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jer-31-31-31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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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같은 주제를 이어 가나, 하나님의 호의가 전보다 자기 백성에게 얼마나 더 풍성하고 풍부할지를 더 분명히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히 그들이 잃은 그 존귀와 위대함의 회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낫고 더 빼어난 무엇을 약속한다. 이로써 우리는, 이 구절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킴을 본다.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보다 나은 것을 백성이 바랄 수도, 바라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가장 완전한 교훈의 규범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치우면, 우리가 율법에 머물러야 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언함을 결론짓는다. 또 이 구절은 사도들도 주목할 만하고 기억할 만한 것으로 인용한다(로마서 11:27, 히브리서 8:8, 히브리서 10:16).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따르는 가르침의 순서와 방식을 살펴야 한다. 선지자는 내가 앞서 말한 바, 곧 우리가 살핀 것이 유대인들에게 믿기 어려웠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사람의 감각으로는 거의 알아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후, 믿음의 부족을 막으려고, 주께서 새롭고 비상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기 자비를 나타내시리라고 덧붙인다. 이로써 우리는 선지자가 어찌하여 이 구절을 자기 앞선 교훈에 더하는지 본다. 그가 새 언약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가 구원의 소망으로 격려하려 한 그 비참한 사람들은 늘 흔들렸을 것이며, 아니 대다수가 이미 절망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그들 앞에 새 언약을 두니, 마치 그들이 더 멀리나 더 높이 바라보거나, 그가 말한 하나님의 은혜를 그때 일의 형편의 겉모양으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여기서, 때가 차매 나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호의를 칭송함에는 의심이 없다. 또 우리는 늘, 백성이 자기 땅으로 돌아온 때부터, 해방의 호의를 받아들인 자들의 믿음이 가장 무거운 시험으로 공격받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 모든 이웃에게 잔인하게 시달리고 그토록 많은 환난에 노출되기보다 영원한 유배에 머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다만 바벨론 유배에서 회복되기만 한 것이라면 그것은 작은 일이었으나, 경건한 자들은 자기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회복 후에 가르치는 직분을 행한 선지자들이 이 점에 머무름을 본다. 곧 그들이 그때 나타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야 하며, 자기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폭정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지치고 무거운 다툼으로 끌려드는 것을 보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학개가 장래 성전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스가랴와 말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또 우리 선지자가 새 언약을 말함의 목적도 같았으니, 곧 신실한 자들이 자기 땅을 다시 누린 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그 행복을 베풀지 않으셨다고 그분을 거슬러 떠들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이것이 선지자가 새 언약을 말한 둘째 이유이다. 앞서처럼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또 유다와 언약을 맺으실 날이 오리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잘 알려진 대로 열 지파는 유다 왕국이 아직 서 있을 때 유배로 끌려갔다. 또 그들이 다윗의 집에서 떠났을 때 마치 다른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기를 그치지 않으셨으나,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자기를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몸이 있으리라 약속하시니, 그분이 그들을 모아 함께 연합하게 하시고 두 집처럼 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새 언약으로 말하면, 그것은 첫 언약에 반대되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와 모순되거나 자기와 다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자기 택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그분은, 마치 자기 신실하심을 잊으신 듯 그 뜻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첫 언약은 침범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분은 이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율법은 그 언약의 확증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하나님께서 자기 종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에 의존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새, 곧 반대되거나 다른 언약을 결코 맺으실 수 없었음이 따른다. 우리 구원의 소망이 어디서 나오는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복된 씨에서가 아닌가? 또 우리가 어찌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라 불리는가? 믿음의 공통된 끈으로 인함이 아닌가? 어찌하여 신실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품으로 모인다 하는가? 어찌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이 동과 서에서 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앉으리라 말씀하시는가?(누가복음 16:22, 마태복음 8:11) 이것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전에 아브라함과 맺으시고 마침내 모세의 손으로 확증하신 그 언약 외에 다른 어떤 언약도 맺으신 적이 없음을 충분히 보인다. 이 주제는 더 충분히 다룰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처음에 맺으신 언약이 영원함을 간략히 보임으로 족하다. 이제 그분이 어찌하여 백성에게 새 언약을 약속하시는지 보자. 그것이 새롭다 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른바 형식을 가리킨다. 또 그 형식 곧 방식은 말씀뿐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 그다음 거룩한 영의 은혜, 그리고 가르침의 온 외적 방식을 살핀다. 그러나 그 실체는 동일하게 남는다. 실체로 나는 교훈을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복음에서 율법이 담은 것 외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교훈의 실체에 관해서는 한 음절도 바꾸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음을 본다. 그분은 율법에 완전한 삶의 규범을 담으셨고, 또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보이셨으며, 모형과 그림으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셨으니, 그리하여 죄 사함이 거기 분명히 나타나고 [무엇이 곧 우리 구원의 길인지가 드러난다].
원주석
- 번역원본
commentary-section/cal-jer-31-31-31(Calvin, PD) - CC0-1.0 · Sonnet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