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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jer-31-12-12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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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들이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러 오리라고 말한다. 이 말로 예레미야는 성전의 회복을 약속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오직 평안과 부와 즐거움만 생각한다면 갈대아에 머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갈대아의 비옥함과 쾌적함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의 덧없는 삶의 유익으로 보면 거기 거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더 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오기를 바란 주된 이유는, 이방인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약속된 기업에 거하되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며 하늘의 안식을 바라보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백성의 귀환에 관해 지금까지 말한 것은, 하나님의 예배 회복에 관한 이 약속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유롭게 될 목적, 곧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게 하려 함임을 보임으로 감사하라 권한다. 우리는 참으로 성전이 그 산꼭대기에 지어졌음을 안다. 그러나 선지자가 높은 곳을 언급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올 때 감사가 자유롭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배 가운데 사는 동안 마치 벙어리 같았다. 그래서 시편에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편 137:4)라고 있다. 또 그들은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들이 시온의 높은 곳에서, 곧 어두운 구석이 아니라 그 소리가 멀리 들리도록 이 호의를 찬송하리라고 말할 때 이것이 그가 가리키는 유익이다. 그는 덧붙인다. "그들이 함께 여호와의 선하심으로, 곧 밀과 포도주와 기름으로 흘러오리라." 선지자들 가운데 흔한 이 어법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무지한 백성의 이해에 맞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묘사하며, 그래서 외적인 형상을 그들 앞에 둔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주제일 때 금과 은과 온갖 부, 또 큰 광휘와 큰 권능이 언급된다. 세상을 넘고 위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곧바로 깨달을 수 없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감옥에 갇혀 있다. 나는 우리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땅에 거하는 동안에는 우리 마음을 위로 들어 올려 하나님의 하늘 영광에까지 꿰뚫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그분이 우리 생각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이 곧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땅의 나라에 비유하여 펼친 까닭이다. 또 우리는 구약에 한 특성이 있었음을 안다. 곧 복음에서 분명히 계시된 것을 하나님께서 그림자로 덮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이 우리에게 열린다. 그러므로 이런 진술 방식은 이제 우리에게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니, 그것이 하늘의 것을 누림에서 우리를 뒤로 끌어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옛 백성의 처지를 구별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 아래서 몽학선생 아래 있는 아이였으나, 우리는 장성하였으므로 조상들이 살았던 그 종 됨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났음을 일깨운다(갈라디아서 3:23). 다윗은 비록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았으나 자기 한계 안에 머물렀다. 하나님께서 그때 자기 교회를, 가르치는 방식이 아이들에게 맞도록 다스리려 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후로는 그림자와 외적 형상이 그쳤다. 비록 경건이 바울의 증언대로 현세와 내세에 관한 약속을 가질지라도(디모데전서 4:8), 우리는 그 초보적인 교훈을 넘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신실한 자들에게 포도주와 기름과 밀을 약속할 때, 그 목적은 유년의 처지와 이해에 따라 그들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점차 더 높은 것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또 이것을 주의 깊이 주목해야 한다. 많은 세속적인 사람이 이런 문장을 읽을 때, 백성이 오직 현재의 만족에만 매여 있었고 모든 유대인이 자기 식욕의 종이어서 하나님께 돼지나 소처럼 먹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온전히 미워해야 한다. 그것을 품는 자들은 우리와 같은 소망을 품었던 조상들을 가장 심하게 욕되게 할 뿐 아니라, 곧 그들도 사도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영원한 기업을 늘 바라보았음에도(히브리서 11:13) 이를 욕되게 하고, 또 교회의 몸을 분열시키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하면서도 전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꺼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조상들이 그 마음에 그토록 짐승 같지 않아 자기 생각을 이 세상에 가두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가 마침내 하늘의 삶을 누리려 하나님께 양자 됨을 알았기에 스스로를 나그네라 불렀다. 가나안 땅에 오래 거하였던 야곱은 자기 평생이 끊임없는 순례였다고 말한다(창세기 47:9). 사도는 이를 지혜롭게 주목하여,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였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인정하셨다고 말한다(히브리서 11:13). 그러므로 거룩한 조상들은 우리가 이제 복음에서 받는 것과 같은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도 같은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하나님께서 그때 자기 은혜를 보이는 형상 아래 두셨기에 더 흐릿하였으나, 이제는 형상과 모형이 그치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우리에게 더 분명히 나타나신 데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교훈을 우리의 유익에 지혜롭게 적용하여 [땅의 것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원주석

엣지 (그래프 연결)

들어오는(in)
Calvin's on Jeremiah 31:12 translated_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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